Great is thy faithfulness

그 일이 있었던 게 대학교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때가 어두웠던 게 저녁 때라 그랬던 건지, 겨울날이라 그랬던 건지, 아니면 그냥 내 마음이 어두워서 모든 장면을 어둡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어두웠던 나의 대학시절 언제쯤이었다고 범위를 많이 넓혀보면, 대충 들어맞을 것입니다.


아직 알고리즘이 지금처럼 치열하고 교묘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데 왜 그 노래가 나에게 다가왔고 내가 그걸 클릭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 당시 푹 빠져 있었던 제레미 아이언스 덕분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영상을 만나 클릭을 했고, 노래를 들었으며, 그 후로 그 노래에 거하게 치여버려서 한동안은 그 노래만 듣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기억 속의 나는 캠퍼스 아랫자락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귀에는 줄이어폰을 꽂은 채로. 넓은 잔디밭을 둘러 길이라는 게 나 있었지만 대학은 원래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서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곳이고, 그래서 모두가 길을 따라 삥 둘러 가기보단 최단거리를 산출해서 직선주로로 가로질러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기운이 딸리고 몸뚱아리가 무거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 저곳에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 너무나도 버거웠기 때문에 그런 문화를 십분 활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항상 어딘가를 가기 위해 공터를 가로질러 가면서 내 지친 발걸음에 내가 지쳐 지겨워지다 못해 깊이 가라앉아 아예 걷는 걸 포기할까 싶을 때 쯤에 그 노래를 만나 그 힘으로 또 얼마간은 걸어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웅장하고 장대한 오케스트라의 상승 선율이 귀를 사로잡고 곧이어 디크레센도, 새들이 속삭이는 듯이 간지러운 도입부가 끝나고 나면 무대를 둘러싼 혼성 콰이어가 노래를 시작합니다. 처음에 제 눈길을 사로잡은건 옷을 맞춰입기는 커녕 제 개성을 아주 유감없이, 단 한 톨의 유감이나 아쉬움도 없이 100% 뽐내는 사람들의 형태들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형형색색으로 화려하던지, 아 여긴 미국 연예인 합창단인가 보군 하고 생각했으니까요. 무대가 익숙하고 자신을 내보이는 것에 서툴지 않으며, 어쩌면 감정을 있는 것보다 더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도 거짓되다기보단 오히려 자연스러움에 가까운 사람들 같아보였습니다. 자신을 다투어 드러내면서도 반짝이는 눈으로 은혜를 표현하며 올라간 입꼬리로 감사를 나타내는 게, 내가 받은 은혜가 더 크다고 서로 자랑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그렇게 나쁘게만은 보이지 않았다면 노래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저의 줏대가 흔들렸던 탓일까요?

후반부의 전조부분은 매우 강렬하게 저를 사로잡아서, 그 멜로디는 여전히 제 마음 속에 남아있습니다. 에릭 휘태커 아저씨가 그러더군요. composer는 collector라고. 길을 걷다 예쁜 조약돌을 발견하고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가 나중에 앉았을 때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동안 모아뒀던 걸 책상 위에 펼쳐본 뒤 콜라주 작품을 만드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제가 어느 날 갑자기 몇 달 만에 노트북을 열고 한 음 한 음 새겨넣는 것이 그런거였겠죠? 아무튼 어디서 주워들은 걸 좋다고 간직하고 있다가 이걸 꺼내쓰면 뭔가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자꾸만 소심해지던 제게 에릭 아저씨는 위로와 확신을 주었습니다. 감사해요 아저씨.

노래가 끝났습니다. 감격과 감사의 박수가 누구부터라고 할 것도 없이 터져나옵니다. 이제 끝났나 싶은데 몇몇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great is thy faithfulness, great is thy faithfulness’ 둘 셋의 목소리에 금방 사람들이 화답하여 곧 꽤 큰 소리가 되었습니다. 전 여기서 매번 피아노의 센스에 감탄합니다. 그리고는 또 생각합니다. ‘조는 어떻게 맞춘거지?’ 마치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 원래 그렇게 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어긋나지도 않고 퉁탕거리지도 않게, 미처 다 끝내지 못하고 마무리 하지 못한 감동을 이 부분에서 모두 풀어서 하늘로 날려보냅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납니다.

어둑어둑한 겨울날 저녁의 들판을 가로질러 가던 순례자처럼, 저는 그렇게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힘겨워하며 걷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노래는 저보고 쓰러지지 말라고 보내주신 노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쓰러지지 않고 잘 걸어서 이제 이곳까지 왔습니다. 어떻게 된게 22살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건강합니다. 밥도 잘 챙겨먹고, 운동도 꼬박꼬박하고, 몸도 더 균형있고 군더더기 없게 속근육을 채우고 있습니다. 척추를 지탱할 힘이 없어 거북이가 되다 못해 땅바닥에 고꾸라지려던 몸이 이제는 그때보다 훨씬 쭉 펴졌습니다. 놀라운 일이에요.

지난 주 성가곡이 ‘오 신실하신 주’였습니다. 일주일 간 반주연습을 하면서 아마 혼자서 은혜는 제일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봅니다. 한글가사는 ‘일용한 모든 것 내려주시니’지만 영어가사로 보면 그 느낌이 확연히 다릅니다. ‘All I have needed, thy hand hath provided’. Indeed. 저는 또 울컥하며 차오르는 눈물을 잘 말려보려고 고개를 위로 들어보기도 하고 눈을 깜빡여보기도 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세월이었지만 정말로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고 나의 길을 예비하셨으며 지금까지 인도하셨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이제 경험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요. 사람의 심장은 발생 3주때부터 뛰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단 1초도 쉬지 않고 박동을 계속합니다. 저는 매일 어김이 없이 떠오르는 태양, 계절을 따라 움직이는 별자리, 변화하는 날씨에서와 같이 심장박동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지 않는다면, 손을 1초라도 놓으신다면, 내 생명은 먼지와 같이 바닥으로 스러져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안과 걱정을 완전히 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건 거짓말이고 만용이지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훨씬 더 단단하고 평온하게 앞으로 닥쳐올 고난들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차피 고난은 오게 되어 있고, 나는 또 그 시련들을 매우 힘들어하면서도 어찌어찌 통과해나갈테니까요. 그리고 나면 폭풍우를 통과하고 난 다음의 나는 그 전보다는 약간 더 낡고 늙어서는 오래된 것들이 그렇듯이 약간의 힘을 잃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훨씬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Great is thy faithful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