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31일 오전 8:51
신 16:1-17
지켜
함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과연 나는 구원을 받고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가?
Everything is back to normal now.
I’m getting better.
어제는 카페인 + 탄수화물 커팅이 짬뽕이 되서 힘들었다
지금도 약간 어지럽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
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p.122
오후 7:59
내가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을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주신다
그거면 되는건데
나는 왜 자꾸만
말하자면
그는 훌륭한 도구이며
나는 나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신이 남성이라거나 여성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은 남자이자 여자이며, 그 이상의 존재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이 우리를 좇고 있으며, 우리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은 믿기 어려울 만큼 우리를 사랑하며, 아무리 빨리 아무리 멀리 도망가더라도 우리를 소유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에게서 도망치는 개인의 투쟁은 기껏해야 얼마나 오랫동안 사소하고도 유치한 저항을 계속할 수 있을지, 그리고 자기도취에 빠진 침묵을 고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뿐이다. 우리는 결국 신에게 항복하고,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러낸다. 존 던이 종교 소네트 14번을 썼을 때 그러했듯이 말이다.
내 가슴을 치소서, 삼위일체의 신이여…
당신께 나를 데려가 나를 가두소서.
당신의 노예가 되어야만 나는 자유로울 수 있으며
당신이 나를 겁탈해야만 나는 순결할 수 있습니다.
M. 스캇 펙, 끝나지 않은 여행, p.322-323
실제로 내 모습이 그렇다. 나는 자꾸 실수하고 심지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늘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게 거리를 두려 한다(그러다 실패한다). 그렇다고 해야할 때 아니라고 말하고, 아니라고 해야 할 때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지도 모르고 문득 거룩한 순간에 들어와 있다가 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잘 사랑하지 못하고, 그러다 우연히 나도 모르게 제때에 제대로 말하고, 그러다 무엇이 중요한지 잊어버리고, 그러다 요긴할 때 애정을 보이고, 그러다 돌아서서 자신에 매몰된다.
나디아 볼즈웨버, 어쩌다 거룩하게, p.22
2024년 1월 30일 오전 8:44
오늘의 말씀은 신명기 15:1-23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
젊음이 내 몸을 떠나가고 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
오후 11:36
그 모든 시도와 실패와 절망이
마지막에는 의미를 갖게 되는 거라면
받게 되는 질문과
지어야 하는 표정과
해야하는 대답
그것은 일종의 수치이자 모욕이다
신앙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왜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왜 일요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교회에 있어야 하는지, 그것도 모자라서 평일에도 교회에 가야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아니, 편협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설명은 하되 피터지는 설득은…아 아무래도 좀 힘듭니다
꿈과 희망과 소망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제 안의 비밀한 소망과 환상들을 나누고
그의 비밀한 소망과 환상들을 나누고
주님의 일하심을 증언할 때
때로는 같은 깨달음으로
때로는 하나로 합쳐져 온전한 하나의 깨달음으로
매일이 새롭고 기쁜 교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저로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예쁘게 봐주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제가 너무 크거나 못생겼다고 느끼지 않게 해주고
괴어 마땅한 작은 새처럼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제가 우는 모습을 보고 못났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안타깝다고 봐주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애쓰지 않아도 그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단점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영혼을 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작은 누이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동반자였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꿈을 부끄럼 없이 이야기하고
그걸 실제로 둘이서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제 팬이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2024년 1월 29일 오전 11:46
나는 왜 자꾸 지하철 꿈을 꾸는걸까
오후 5:5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2-29
It’s ok
You can do whatever you want
You’re free in ME
지금은 어리광주간인가
자꾸 애같은 징징이 나온다
그리고 괜찮다고 하신다
지금은 이게 필요한 때인가 보다
모든 것이 최선이었다고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했지만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자꾸 그랬다면 어땠을까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어린아이 옆에 서있는 어른의 나는
아직도 그소리니! 그만하지 못해! 애도 아니고! 그만!
이러고 있고
정작 주님은 난처한듯 그럴 것 없다는 듯의 옅은 웃음으로
괜찮다고 하고 싶은 말 다하라고 그러고 계신다
2024년 1월 29일 오전 1:21
계곡은 이렇게 잠에서 깨어난다. 새벽 2시 15분, 수도원에서 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 종이 올리고, 성무일도가 시작된다. 밖에는 황소개구리가 개울이나 손님 숙소 연못에서 ‘옴’ 하고 내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떤 날 밤에는 황소개구리가 삼매경에 빠져 있다. ‘옴’ 소리조차 없다. 요즘에는 쏙독새의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가 아침 3시경에 시작된다. 그 새는 언제나 가까이 있지는 않다. 1.6킬로미터쯤 떨어진 동쪽 숲 속에서 이따금씩 두 마리가 함께 운다.
아직은 빛이라고 할 빛도 없는, 경이롭고 형언할 수 없이 순결한 순간, 아버지께서 완전한 침묵 가운데 새들의 눈을 뜨게 할 때 정적을 깨뜨리는 새들의 울음소리는 하늘 아래 여명의 ‘절대무絶對無 의 지점point vierge’을 세상에 알린다. 그 새들은 유창한 노래가 아니라 그들의 여명 상태, 곧 ‘절대무의 지점’에 있는 상태에서 의식을 일깨우는 질문으로 하느님께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들이 자기들이 ‘존재’할 시간인지 물으면 하느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신다. 그러면 그들은 한 마리씩 깨어나 새가 된다. 그들은 새가 되어 나타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들은 완전히 제 모습이 되어 날기도 할 것이다.
한편 하루 중 가장 경이로운 순간은 세상의 첫날 아침에 그러했듯이, 삼라만상이 순결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존재’의 허락을 청하는 때다.
온전한 지혜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감미로운 순간에 스스로의 모습을 가다듬고 나타나려 한다. 인간의 지혜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자제自制 하느라 어느 누구의 허락도 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꺾이지 않는 목적을 가진 인간으로서 아침을 맞이한다. 우리는 시간을 알고 기간을 정한다. 우리는 기간을 정할 수 있고, 우리는 바로 시작부터 우리의 옳음을 입증하는 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몇 시인지 알고 있다. 우리는 감춰진 내면의 법칙과 접촉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날이 되어야 할지를 미리 말하려 한다. 그리고 나서 필요하다면 하루가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도록 조처를 취하려 한다.
새들은 어둠과 빛 사이, 비존재와 존재 사이의 절대무의 지점 외에는 알려줄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만일 경험이 있다면, 새들이 깨어나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어리석음이지 새들의 어리석음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쓸모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어떤 것, 예를 들어 지금 4시라고 새들이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욱더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잠에서 깨어난다. 먼저 개똥지빠귀, 홍관조, 그리고 내가 모르는 어떤 새들이 깨어난다. 다음에 멧종다리와 굴뚝새가 깨어나고, 마침내 비둘기와 까마귀가 깨어난다.
까마귀가 깨어나는 모습은 사람이 깨어날 때와 가장 흡사하다. 불평이 많고 시끄럽고 품위가 없다.
여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낙원이 주위의 도처에 있는데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낙원은 활짝 열려 있다. 불 칼은 제거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우리 중 ‘한 사람은 자기의 밭으로,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사놓은 것을 보러’ 간다. 불이 켜져 있다. 시계는 똑딱똑딱 가고 있다. 자동 온도조절장치는 작동하고 있다. 조리용 레인지는 요리를 하고 있다. 전기면도기는 라디오 수신기에 잡음을 더해 주고 있다. “지혜.”라고 여명의 부제副祭가 외친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
-토머스 머튼의 단상: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 p.237-239
다시 한 번 le point vierge(나는 이것을 번역할 수가 없다)를 여기서 생각해 본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죄와 착각으로 손상되지 않는 절대무無의 지점, 순수한 진리의 지점, 우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내는 환상과 우리 의지의 무자비함이 접근할 수 없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섬광이 있다. 절대무와 절대적 가난의 이 극히 작은 지점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순수한 영광이다. 그것은 이른바 우리의 가난으로, 우리의 빈곤으로, 우리의 의존으로, 우리의 하느님 자녀 됨으로 우리 안에 새겨진 그분의 이름이다. 그것은 천국의 비가시적인 빛으로 타오르는 순수한 다이아몬드와 같다. 그것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삶의 모든 어두움과 잔학함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태양과 같은 존재의 얼굴과 섬광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히 많은 점으로 이어진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보기 위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주어질 뿐이다. 천국의 문은 어디에나 있다.
-토머스 머튼의 단상: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 p.285-286
2024년 1월 28일 오후 5:42
3살짜리 어린아이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게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아이는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자기가 버려졌다고만 생각하며
지워지지 않았고 덮어지지 않았고 치료되지 않았다
그것은 거기에 그대로 남아 천막 비닐 한 장만 위에 덮혀 있었을 뿐이었다
하늘을 향해 드는 고개 위를 바라보는 눈빛 답을 찾는 인간
그 와중에도 아버지 제 마음은 온전하고 순결합니다 다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없었던 기도와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소원
어쩌면 내가 엄마 입장이 되어봐야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예상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제 상처를 고백하고 나눌 때
똑같이 아파해주고
상처를 보듬어주고
치유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봐주고
나음을 입었을 때 기뻐하며
그 모든 과정이 오로지 주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해주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덧셈 뺄셈 계산에 익숙한 두뇌는
이득과 손해를 굴려보고 있습니다
상대방도 그럴 것이라 어리짐작하면서요
나에게 먼저 말해라
또 말해라 또 말해라
어쩜 이렇게
말할 때마다 새롭게 눈물이 날까요
사람이라면
질려버릴거에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죠
하나님의 모든 것은 너무나 크고 대단해서
인내심도 그러하여서
하늘과 같고 바다와 같아서
언제까지라도 참으시고
천번 말하면 눈물이 안날까요
천번 말하면 저라도 질려버릴 것 같은데요
나는 그렇지 않다 내게 말해라 또 말해라 말하고 또 말해라
오랜 기도의 답이 제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오랜 기도의 응답이 제가 되기를
주일은 특별히 일찍 일어나서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아침에 묵상을 할 수가 없네
2024년 1월 27일 오전 9:15
1. 손민수 슈만피아노협주곡 미쳤다 너무 죠아…
2. 늦잠을 잤다 내 오랜 버릇인 ‘좀만 더 자기와 깨어나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이제 23분이야~일어나야해~’
아아아…하면서 눈을 뜨고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보니 26분 (그새 3분이 더 지났군) 근데 문제는 앞의 숫자가 6이 아닌 7…
7:26 ??? 7시 26분 ???
아놔
순간 머리 속에 여러 생각이 스친다
-이게 진짜일리 없어
-진짜 맞거든
-그래도 평일이 아니고 토요일이라 다행이다
-지금 나가면 몇 분 걸리려나
-가만이쓰바 일단 늦는다는 문자를 좀 보내놓고…
-아휴 인간아…
알람 앱을 켜서 확인해보니 알람이 다 꺼져있다 나는 어제 알람을 안맞추고 잔 것일까 아니면 울리는 족족 꺼버린 것일까
아무튼 그렇게 달려서 왔다는 이야기 늦었다는 이야기 그래도 허덕허덕 할건 했다는 이야기
어제 안그래도 직주근접에 대한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면 더더욱 회사근처로 집을 옮기고 싶어지잖아
거리가 가까워지면 나는 부지런하고 알차게 아침시간을 활용할까 아니면 끝의 끝까지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출근하는 그냥 아침 잠 늘어버린 사람이 될까
3. 아무튼 그 생각도 했다 이 일이 버겁다는 생각
그렇다고 이걸 때려치고 싶다거나 나에게 더 맞는 일이 어디있을까 찾는다는 것은 아니고
(다행히도 나는 이제 그 단계를 지났다 오예 땡큐베리마치 대체 몇 년이 걸린거지)
그냥 이 일은 나에게 버거운 일이다 사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할 수가 있고 의지해야 하고…뭐 그렇긴 하지만
힘든 건 힘든거라는 이야기
아침에 일어나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한다는 것도 힘든거라는 이야기
4. 슈만의 생애를 생각해본다.
어린이 정경과 트로이메라이, 클라라의 남편, 이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슈만인데
우연히 만난 클립에서 피아노협주곡 3악장 바로 그 부분이 내 심장을 때리고야 말았고
처음에는 그 부분 빼고는 재미가 없었지만 계속 듣다보니 전 곡이 점점 좋아지고
이게 슈만의 유일한 피아노협주곡이라는 데에 가산점이 부여되고 (그러면 안되는데 유일성에는 꼭 특별 가산점이 붙는단 말이지)
그러다가 첼리스트 심준호님 인스타에서 슈만에 대한 글을 보고 이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과 안타까움이 또 특가산점을 부여하고
그리고는 나무위키를 찾아서 보는데 뭐야 이 쓰레기는 -_-?
글 하나에 누군가를 미워하다가 다시 좋아하다가
나왔다 부화뇌동 again
다시 심준호님의 인스타를 찾아서 글을 읽어본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누군가를 소개하면서
내 글과 말로 인해 그 사람이 더 나아보이게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진심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고 아껴야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는다.
5. 아 잠에서 깨면서 노래가 재생이 될 때가 있는데
가끔은 노래로 말씀하시는 바가 있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때의 내 관심사, 자기 전에 듣고 보았던 것들이 재생이 된다
아침에 깨자마자 000 000 000~ 노래가 재생이 되는데
아 이게 별로 좋은 게 아니구나
그만해야겠다
하는 깨달음이 왔다
6. 결국에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사물이건 사람이건 나의 집념과 집착이건
그것이 비록 처음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한 것으로 시작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방해가 되기 시작한다면
그때에는 제거해야 한다
7. 토요일에는 큰일이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이군
2024년 1월 26일 오전 7:40
그러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버리겠고만.
바닷가 씬은 계속 내 머리 속에 남아있다.
이건 과거에 관한 기억이 아닌 일어나지 않은 미래 혹은 상상의 이야기이다.
글쎄 이게 예언 혹은 예고편일지
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고회로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이야기일지
불안에 떠는 사람은
그 나쁜 일이 실제로 일어남으로서
비로소 완전한 완결을 맞는다
뭐 그런 글도 있었는데
약간은 쌀쌀한 가을 혹은 겨울의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서서
4인 가족이 각자 문을 열고 내린다.
비대하고 허약하여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늙고 병든 내가 제일 느리다
살은 너무 찌고
다리에 근육은 하나도 없고
관절은 마디마디가 쑤신다.
삶의 의욕도 즐거움도 재미도 사라진 듯 하다.
두 아이는 신이 나서 저만치 벌써 모래해변을 달려나가고 있다. 작은 아이가 맨 앞, 큰 애가 그 뒤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내 인생에 애는 딱 1명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남편, 아 내 남편
호리호리한 체격에
군살은 붙지 않았고 (그 나름 붙기는 하였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젊을 때도 잘 생겼던 얼굴은 세월이 지나면서 주름이 지고 흰머리가 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그는 여자들을 매혹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왜 나와 결혼한걸까)
자잘한 하운드투스체크무늬의, 약간은 도톰한 감색 블레이저를 걸치고
오래 입었지만 질이 좋고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시간의 멋있는 부분만 배어있는 짙은 회색의 바지를 입고
상의와 컬러를 맞춘듯한 신발을 신고
그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서는 고개를 숙이고 특유의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어나간다.
운전은 그가 했고 나는 뒷자석에 앉아 있다가 나와서 이제야 차 문을 닫았기 때문에 우리 사이 거리는 이미 꽤 떨어져 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마련한 것이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있다.
하지만 자신들의 내밀한 비밀로 남겨뒀어야 할 이야기를
세상 만천하에 까발려서 그걸로 번 돈이기에
그들은 그것을 누리면서도 혐오한다.
너무 느려서일까
차문 닫히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앞서 나가던 두 아이와
열 발자국 쯤 앞서있던 남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들에게 나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2024년 1월 25일 오전 8:30
“내려가서 연말정산 하셔야 해요.”
“아 그래요?” (연말정산? 안하는거 아니었어?)
“네, 그거 동의 하셨죠?”
“네?” (그거 동의가 뭐지)
결론은 연말정산을 했었어야 했다…
끙…
어쩌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3:32 PM
언젠가 이 모든 날들이 지나고
놓임을 명 받았을 때
내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으면서
어깨를 죄고 있던 옷이 풀리면서
멍에가 풀리는 것을 알아차릴 때
그때야 비로소
아, 이 옷이
이렇게나 무거운 것이었었군요.
입고 있었을 땐 몰랐는데
굉장히 무거웠었네요.
이 무거운 옷을 입고
어린아이가 잘도 어른 행세를 하고 있었네요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쓰면서요
아마 다 보였을 거에요
그래서 너른 이해로 다들 감싸고 넘어가준 것이겠지요.
이제 전 가벼워졌어요.
그러면 나는 다시 아무 것도 없이 꿈만 가지고 있던 5살 짜리로 돌아가서
아무도 없고 나와 나의 신만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그곳으로
다시
60년이 꿈결같이 지나갔으리라
즐거웠었다고
재밌었다고
행복했었다고
때때로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괴로웠으나
함께 한 모든 나날들이 기쁨이었다고
2024년 1월 24일
romeo et juliette를 다시 듣고 있다.
오래된 음악을 다시 듣는 것은 comfort zone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사람이..뭐 33살을 지나면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리고 그게 뇌가 굳었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는..
그런 글을 어디서 읽고서는 오! 안돼! 하면서 발작적이고 집착적으로 새로운 노래를 찾아들으려고 했던 것 같다.
마치 예전 음악을 듣는 것이 게으르고 나태한 것처럼
하지만 뭐 언제나 그렇듯이 오래가지는 못한다. 작심삼일을 122번 하면 얼추 1년이 채워진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오래된 음악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wear out 되었을 때(라고 하자)
익숙하고 잘 알고 있는 선율을 오랜만에 꺼내면서 (대뇌피질 주름사이에 잘도 숨어있었다!)
겨우내 한번도 털지 않아 먼지가 겹겹이 쌓여있지만
그만큼 온기가 빠져나가지 않아 따뜻한
지저분하고 아늑한
이불을 들추고 쏙 들어가
안녕, 잘 있었어?
미안 내 몸이 좀 차지
바깥에 오래 있어서 그래
그래도 나는 좀 컸어 그런 것 같아
너는 그대로구나
아직도 작고
추위를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하지만 지금 듣는 버전은 녹음 버전이라 실황버전과는 다른 구간이 자꾸 들린다 : 불-편)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보면 화가 난다.
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을 보면 분노가 인다.
나는 이걸 누구에게라도 따져 물어야겠다. 책임자가 누구지?
누구의 잘못인가?
어느 단계의 누구의 수행에서 일이 틀어졌는가?
제거하고 교정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같은 것들, 결국엔 다 똑같은 소리이다.
그래서 나는 조직에 분노하고 사회에 분노하고
이 세상의 전쟁에 분노하고
아직도 남아있는게 어이가 없는 부조리에 분노하고
얼마전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만났다.
나는 또 따져물었지
왜죠?
무엇이 부족한 것입니까?
아니면 잘못된 길이었습니까?
아니면 마음을 다 드리지 않았나요?
아직 짚고 넘어가셔야 할 부분이 남아있었나요?
무슨 검증이 더 남은 것일까요?
그런 것들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쏙 빠져 말라버린 모습에서
나는 구도자의 고독과 오롯함을 느꼈고
저 완벽한 옆선을 보십시오. 아 다시 보니 그다지 완벽하진 않군요. 그래도…
그는 분명 선할 것입니다. 선하게 생겼으니까요 (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도 똑같거나 혹은 더 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는데 나는 외모를 보고 홀랑 넘어가서는
부탁받지도 않은 대리자가 되어
몸통을 돌리고 고개를 돌려 쳐들고 또 따져묻고 있는 것이었다
따져묻는 것은 처음에는 분명한 사유로 시작하지만
두 세 문장 뒤에 그 이유는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형체도 없이 소용돌이치는 분노만이 남아
달라붙을 대상을 찾으며 위협적으로 날뛰고 있다
전쟁은요?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은요?
저렇게 선한 사람이 고통받는게 말이나 됩니까?
그니까 이쯤되면 더이상 이유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혹은 비판하거나 공격한다)
논쟁은 어째서 감정과 결부되고야 마는 것일까
아, 피곤하다.
-신이 있다면 세상에 전쟁과 기아는 왜 있으며
-왜 가장 약한 어린아이와 부녀자가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아픈 것은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라는데 그럼 소아암 병동에 누워있는 애들은 쟤네가 죄를 지었거나 부모가 죄를 지어서냐
-신이 있다면 왜 그 때 그 일을 막아주지 않았냐
-왜 내 소중한 사람을 데려갔냐
-왜 날 이렇게 내버려두냐
어떤 이들은 구약을 들이민다 (이래서 배운 사람들이 더 피곤하다)
-무슨 신이 그렇게 잔인하고 악랄하냐. 사랑과 자비의 신이 거기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을 쓸어 몰살하라고 시키는 게 말이 되냐
이건 마치
너네 아빠 살인자지? 사람 죽여서 감옥 갔잖아?
라고 또래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5살짜리 어린아이가
아니야! 우리 아빠 그런사람 아니야! 라고 소리치지만
속으로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자기에게도 남아있어서 혼란스러워하고 슬퍼하는
저 단계는 지나온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보는데
아니면 또 나 혼자 속단하고 내 자신을 과대평가 한걸까?
그래서 다시 돌아가자면
또, 뭔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죠? 라고 따져 묻는 나에게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니… (=이제 너는 그런 단계는 지나지 않았니?)
…
죄송합니다.
요새는 죄송한 일이 참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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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게시판을 나누어서 만들었어야 했는데
괜히 지금 건드렸다가 꼬일까봐
일단은 이렇게 해놨다가 나중에 어떻게 하는걸로…
헤아려 본 슬픔에 대하여 글을 써보려다가 포기했다.
어느 문장을 발췌할까 읽다가
3,4장을 통째로 옮겨적어올 수는 없잖는가
그래서 그랬다는 이야기
2024.1.24 수 23:19
오후 반차였다.
선생님을 만나서 밥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나름 기도도 해봤는데 희미해서 그랬는지 별로 응답은 못받았고 그냥그냥 삶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왔다.
대화를 하면서 남 말을 듣고 있으면 지루해지고
내 이야기를 하면 신남과 동시에 상대방도 지루해하지 않을까 살피고
지루해할테니까 어서 접어야지 싶다가도
교묘하게 자기 자랑 집어넣어서 이야기는 잘만 하고
경청하는 척은 아직도 어렵다
진짜 경청은 얼마나 어려운거야 그럼
그래서 아직도 인간이 덜 되었다는 이야기
정말 엉망진창이다
정리가 하나도 안되어 있는게 내 책상이나 집안이나 컴퓨터 폴더나 이 페이지나 똑같다
머리속이 이모양이라는 뜻이리라
뭐, 나는 이것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해
어쨌든 작동은 하잖아
2024년 1월 23일 오전 8:42
습도가 13%이다.
눈이 바짝바짝 마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북극한파가 불어오는 추운 날이고 히터를 끄면 방은 금세 얼어붙을 것이다.
하루를 쉬는 게 뭐라고 느낌이 생경하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개설만!) 안에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만들어보려다가 장대히 실패하고 일단 닫았다.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만난 것,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통해 자극을 받은 것.
생각은 계속 있었다. 그러고보면 나는 주변 자극에 참 쉽게 움직이는 사람인 것 같다.
떠다니는 실타래들을 그러모아 뭐라도 만들어보면
그러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아직은 형태가 온전하지 않고 그저 희미할 뿐이다.
다들 빡쳐서 날선 소리를 해대다가
마지막에 마무리는 그래도 온건하게 해보려고 하는게 웃기고 안쓰럽다.
웃기다고 쓰면 굉장히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그건 아니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의 아이콘.
논어의 자로편 23에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라고 나온다.
라고 한다.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 오늘도 이렇게 내 모습을 보는군.
요새는 늘 이런 식이다.
이게 학습되고 강화된 자책의 경로일지
아니면 정말 진실된 깨달음일지는.
어제 큐티 말씀에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성경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었던가?
(신 8:17-18)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 9:6)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 10:12-13)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6)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이럴 때 디지털성경의 장점이 드러난다.
앱을 켜서 행복을 검색했다.
성경에 행복은 총 11번 나온다.
하지만 내가 찾던 의미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행복은 어떠한 방식으로 획득할 수 있는가?)에 부합하는 의미는 신명기 10장 딱 한 번이었다.
나머지는 그저그냥 평온한 상태를 기술하는 용도로 쓰인 행복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 찾아헤맸던
그리고 이제는 어느정도 획득했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정말 그것이 맞는 것인지 한편으로는 불안했던
그 행복에 대한 답이 성경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나는 답을 달라고 했으며 그 요청을 들으시고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행복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명시되어 있을 줄은
결국에는 또 그것이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
세상에 질문은 많지만
fancy한 답은 없다
나는 나의 분야에서 이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분야에서는 fancy한 답을 기대하며 질문을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이번에도 역시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익히 여러 번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또 그 답이었다.
적어놓고 보니 꼭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변하지 않고 복잡하지 않고 항상 그자리에 그대로 있는 정답은 안정감을 준다.
혼자서 열심히 감동을 받고 큐티를 마무리하고서는 뒤늦게 드는 생각,
조용하고 옳은 답은 언제나 한 발자욱 늦게 온다.
흥분을 가라앉혔으니 이제 차분히 내 말을 들어보라는 뜻이다.
나는 또 나를 중심으로 생각했구나
포커스를 나에게서 주님으로 돌려 맞추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주님
마음을 드리라니요
그건 제 전부이지 않습니까
가장 쉬워보이면서도 어려운 것이
가장 보잘것 없어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소중한 것이
당신은 지금 제게 엄청난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라고
나도 너에게 전부를 주지 않았니? 하고
화도 안내시고 말씀하시는 그 분에게
그래도요…하면서 두손으로 꼭 쥐고 내놓기를 주저하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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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59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마사지를 받으면서 소뿔괄사로 두피를 조지는 특별 서비스까지 받았는데도 호전이 없다
머리가 왜 아프지…
그래도 엉망진창이 되어서 없애버릴까 고민하다가 없애는 방법도 제대로 모르겠어서 놔뒀던 홈페이지를
겨우 이정도까지 정비하고 게시판도 설치하고 글을 올려본다. 장족의 발전…
모양을 좀 더 심플하게 다듬고 싶지만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잘했어!
2024년 1월 16일 오전 6:57
결핍을 원동력삼아 성장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