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 세상

가끔 ‘당연히 알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아두면 좋으니까 한 번 찾아볼까’ 하고 영단어를 검색했다가 놀라는 경우가 있다. 내가 알고 있던 뜻과 전혀 다른 뜻이 1번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내가 알고 있던 뜻을 허겁지겁 찾아 시선을 밑으로 내려보면 가끔 2번, 대개의 경우 3번에 그 단어가 있고는 했다. aspiration이 그랬고 differentiation이 그랬으며 vessel이 그랬다.
그럴 때마다 새삼 생각한다. 아, 나는 3번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3번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독특한 시선과 새로운 관점으로 환기를 시킬 수 있다는 뜻도 되지만
사실은 미묘하게 어긋난 의사소통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스스로 창조하고 빚어낸 언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는 외국인들일 뿐이다. 같은 한국어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저 사람과 100% 의사소통이 되고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그 와중에도 다수가 몰려 있는 곳이 있고 위성도시처럼 뚝 떨어져 나와있는 집단도, 아예 독고다이로 독야청정 홀로 머물러 있는 섬 같은 1인도 있다. 나는 중심부에서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가.

용기라는 뜻의 courage는 라틴어 Cor에서 왔다는 문구를 강의에서 접했다. 나는 저 Cor라는 단어가 익숙했다. 내가 저걸 어디서 처음 봤더라. 오래지 않아 바로 기억이 났다. 그 기시감의 출처는 Cor pulmonale였다.
그 다음 접한 단어가 coeur였다. 그리고 생각한다. 와, 옛날 사람들은 정말 심장에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구나.


심장과 마음을 뜻하는 단어가 주소지를 공유하고, 엄마를 부르는 단어가 전세계적으로 동일하고 (단지 그것이 어린아이가 가장 쉽게, 먼저 만들어 낼 수 있는 발화라는 다소 낭만없는 설명은 잠깐 못 본 척 하기로 하고), ‘사랑에 빠지다’는 표현이 어디에서나 발견되고, 잠을 잘 때 꾸는 꿈과 미래를 그리는 꿈이 동일어라는 사실이 전세계 공통이다 같은 작은 사실들을 만날 때, 나는 그럴 때 기쁨을 느낀다. 길을 걷다가 발견한 예쁜 돌조각을 주워 주머니에 모으는 것처럼, 나는 의미와 단어를 수집한다. 그리고는 또 생각한다. 바벨 이전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A라는 공통어를 없애고 B, C, D, E, F 등등등을 만들어 내신걸까 아니면 A는 두고 다른 B, C, D, E, F를 만드신 걸까. 그렇다면 그 A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인도유럽어족이 아닐까. 가장 많으니까. 또 생각해본다.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의 창조가 완료되었을 때, 하나님이 빚던 손길을 떼시고 숨결을 불어넣으시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셔서 쳐다보고 계시는 동안 아담이 눈을 감은 채로 숨을 들여마시고 (아니, 내쉬는 게 먼저였을까? 아무래도 흡호가 아니라 호흡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사람이 죽을 때는 숨을 마시며 가지 않던가. 그렇다면 처음은 내쉬는 걸로 시작하는 게 더 말이 되는 것일지도. 음, 끄덕끄덕)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는 찡그렸을지 혹은 이보다 더 평온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떴을지. 그리고 나서 그가 최초로 뱉은 발화는 무엇이었을지. 나는 감히 ‘아-‘라고 추측해본다. 웬만한 언어의 알파벳이 다 그 어절로 시작한다는 것이 내 근거의 전부이다.


세상을 뜨면 일단 한없이 가벼운 몸으로 (아니 몸도 아니지 어쨌든) 지상을 박차고 올라가 우주를 한 바퀴 돌 것이다. 1층, 2층, 3층 하늘도 올라가니 내려가니 유영하다가 별들 사이도 미끄러지듯 헤엄쳐서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지상으로 추락하듯이 낙하하여 바다 속 깊은 곳도 들여다 보고 올 것이다. 시간을 앞으로 돌렸다가 뒤로 풀었다가 빨리 재생도 하다가 내 마음을 잡아 끄는 장면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금 시선을 모아서 그 구간을 반복 재생해도 볼 것이다. 찰나 같기도 영원 같기도 한 그 시간들을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있다 보면 인내심 많게 쳐다보고 있던 내 천사가 손목을 몇 번 들여다보고는 이제는 더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입술 양 끝을 팽팽하게 당기고서는 어느 새 내 뒤로 다가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내 어깨를 툭툭 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그 뜻을 깨닫고 순순히 즐겁게 그를 따라 갈 것이다. 처음에는 둥둥 뜨듯이 가던 우리 둘의 발이 어느 새 바닥을 딛고 걸어가게 되면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옆에서 살짝 나를 앞서서 걸어가는 그를 올려다 보면서 아무래도 좋을 저 이야기들을 조잘조잘 꺼내 놓다가 그래서 답이 뭐냐고 물어볼 것이다. 아니지, 그 때가 되면 묻지 않아도 다 알게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