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은 이렇게 잠에서 깨어난다. 새벽 2시 15분, 수도원에서 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 종이 올리고, 성무일도가 시작된다. 밖에는 황소개구리가 개울이나 손님 숙소 연못에서 ‘옴’ 하고 내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떤 날 밤에는 황소개구리가 삼매경에 빠져 있다. ‘옴’ 소리조차 없다. 요즘에는 쏙독새의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가 아침 3시경에 시작된다. 그 새는 언제나 가까이 있지는 않다. 1.6킬로미터쯤 떨어진 동쪽 숲 속에서 이따금씩 두 마리가 함께 운다.
아직은 빛이라고 할 빛도 없는, 경이롭고 형언할 수 없이 순결한 순간, 아버지께서 완전한 침묵 가운데 새들의 눈을 뜨게 할 때 정적을 깨뜨리는 새들의 울음소리는 하늘 아래 여명의 ‘절대무絶對無 의 지점point vierge’을 세상에 알린다. 그 새들은 유창한 노래가 아니라 그들의 여명 상태, 곧 ‘절대무의 지점’에 있는 상태에서 의식을 일깨우는 질문으로 하느님께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들이 자기들이 ‘존재’할 시간인지 물으면 하느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신다. 그러면 그들은 한 마리씩 깨어나 새가 된다. 그들은 새가 되어 나타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들은 완전히 제 모습이 되어 날기도 할 것이다.
한편 하루 중 가장 경이로운 순간은 세상의 첫날 아침에 그러했듯이, 삼라만상이 순결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존재’의 허락을 청하는 때다.
온전한 지혜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감미로운 순간에 스스로의 모습을 가다듬고 나타나려 한다. 인간의 지혜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자제自制 하느라 어느 누구의 허락도 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꺾이지 않는 목적을 가진 인간으로서 아침을 맞이한다. 우리는 시간을 알고 기간을 정한다. 우리는 기간을 정할 수 있고, 우리는 바로 시작부터 우리의 옳음을 입증하는 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몇 시인지 알고 있다. 우리는 감춰진 내면의 법칙과 접촉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날이 되어야 할지를 미리 말하려 한다. 그리고 나서 필요하다면 하루가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도록 조처를 취하려 한다.
새들은 어둠과 빛 사이, 비존재와 존재 사이의 절대무의 지점 외에는 알려줄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만일 경험이 있다면, 새들이 깨어나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어리석음이지 새들의 어리석음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쓸모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어떤 것, 예를 들어 지금 4시라고 새들이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욱더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잠에서 깨어난다. 먼저 개똥지빠귀, 홍관조, 그리고 내가 모르는 어떤 새들이 깨어난다. 다음에 멧종다리와 굴뚝새가 깨어나고, 마침내 비둘기와 까마귀가 깨어난다.
까마귀가 깨어나는 모습은 사람이 깨어날 때와 가장 흡사하다. 불평이 많고 시끄럽고 품위가 없다.
여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낙원이 주위의 도처에 있는데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낙원은 활짝 열려 있다. 불 칼은 제거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우리 중 ‘한 사람은 자기의 밭으로,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사놓은 것을 보러’ 간다. 불이 켜져 있다. 시계는 똑딱똑딱 가고 있다. 자동 온도조절장치는 작동하고 있다. 조리용 레인지는 요리를 하고 있다. 전기면도기는 라디오 수신기에 잡음을 더해 주고 있다. “지혜.”라고 여명의 부제副祭가 외친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
-토머스 머튼의 단상: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 p.237-239
다시 한 번 le point vierge(나는 이것을 번역할 수가 없다)를 여기서 생각해 본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죄와 착각으로 손상되지 않는 절대무無의 지점, 순수한 진리의 지점, 우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내는 환상과 우리 의지의 무자비함이 접근할 수 없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섬광이 있다. 절대무와 절대적 가난의 이 극히 작은 지점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순수한 영광이다. 그것은 이른바 우리의 가난으로, 우리의 빈곤으로, 우리의 의존으로, 우리의 하느님 자녀 됨으로 우리 안에 새겨진 그분의 이름이다. 그것은 천국의 비가시적인 빛으로 타오르는 순수한 다이아몬드와 같다. 그것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삶의 모든 어두움과 잔학함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태양과 같은 존재의 얼굴과 섬광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히 많은 점으로 이어진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보기 위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주어질 뿐이다. 천국의 문은 어디에나 있다.
-토머스 머튼의 단상: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 p.285-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