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맡은 자는 ‘일을 맡은 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함정은 매우 교묘하고, 또 빈번하게 파여있어서, 매일 매순간 조심하면서 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푹 파인 구덩이에 발이 빠지기 십상이다. 먼저 효능감이 찾아온다. 내가 무엇인가 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나의 맡은 역할이 있고 내가 그것을 차질없이 해나가고 있다는 효능감. 그것이 어릴 때 부모님의 돈으로 배운 악기이든, 혹은 그 환경에 노출될 수 있었던 덕에 쌓을 수 있었던 음악적 소양이든, 또는 나는 한 것이 없으나 날때부터 장착해주신 고급 성대이든, 아니면 5분 전에 배운 방송실 기계 조작법이든.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정신을 매우 쉽게 빼앗을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의 나보다 더 크고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 다음 찾아오는 함정은 타인에 대한 비판과 그들보다 내가 낫다는 우월감, 선민의식이다. 베이스를 맡은 형제가 또 코드진행을 틀렸다. 부주의한 그의 실수 때문에 기껏 열심히 만들어놓았던 예배의 분위기에 금이 가 버렸다. 김이 샌다. 좀 있어보니 드럼을 맡은 형제가 또 주제와 분수를 모르고 마구 날뛴다. 저 인간은 왜 저러지? 나처럼 다른 지체의 소리를 들으면서 조화롭게 예배를 뒷받침해야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다음 찾아오는 최종보스가 있다. 허탈감이다. 이 허탈하고 공허한 기분은 매우 강력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작지만 확실한 나의 역할이 있었는데, 이제 시간이 흘러 순서가 끝나고 손에 쥔 나의 규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왔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까의 나는 원래의 나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존재였는데, 이 기분이 5m 만큼 올라간 느낌을 선사한다면 지위를 박탈당하고 난 뒤 일반성도 2837로 돌아가 자리에 앉은 나의 기분은 지하 100m 땅을 파고 끝도 없이 가라앉는다. 설교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방금까지 내가 앉아있었던 자리를 바라본다. 아직도 일하고 있는 방송실 담당 형제가 예배의 순서에 맞추어 충실히 화면을 넘기고 있다. 나는 그가 부럽다. 그의 일을 빼앗아 할 수 있다면 나는 뭐라도 할 것이다. 상상 속에서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신디와 기타도 친다. 마이크를 잡고 정중앙에서 인도자의 역할도 수행한다. 무대 뒤로 돌아 들어가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앰프의 볼륨을 조절한다. 나는 그 모든 것을 한다. 나는 이 예배의 주도자이자 주인공이다.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다. 아니, 잘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내 마음 속 스테이지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 무섭고 끔찍하여 눈을 질끈 감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아주 살짝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머리 속 무대를 흩어 지워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