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과 두부

접수에 익숙한 이름이 떴다. 화목토 투석환자다.
일주일에 3번, 정말 가족보다도 얼굴을 더 자주 보는 사이인데
이렇게 부러 외래에까지 찾아온다는 건 필시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다. 긴장하게 된다.
빼꼼 내밀은 고개로 열리는 문을 맞이하니 손에 음료수 박스를 들고 계신다. 일단 안심한다. 경계태세 해제.

환자는 70대 할머니, 보호자는 남편
우리 투석실에 사랑꾼 남편 투톱이 있는데 그 중 한 분이다.
아랍-두부 이론이 여기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이 커플은 어머니가 아랍, 아버님이 두부이다. (다른 커플은 반대다)
아랍은 두부를 귀찮아 한다. 두부는 아랍이 걱정되어 노이로제가 걸려버렸다고 하소연하신다.
두부는 말이 많아진다. 걱정이 쌓이고 쌓여 입밖으로 와그르르 쏟아져 나오는데, 그게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다 하면
분명 아랍은 내 말을 듣고 더 화를 낼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애써 그 말을 참는다.
아랍은 나를 보며 제발 나 좀 귀찮게 하지 않게 이야기해달라 하시고, 두부는 나를 보며 제발 내 말 좀 들으라고 이야기해달라 하신다.
나는 어째야 할지 몰라 그냥 웃어버린다. 그들도 딱히 내 답을 바라고 한 말들은 아니기 때문에 이 단락은 그냥 마무리된다.
얼마전에 찍은 엑스레이가 궁금해서 오셨다. 아,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드렸더니 일부러 이렇게 외래까지 찾아오시게 된거군요.
속으로 죄송합니다…한마디 하고 서둘러 엑스레이를 켠다. 이게 지난 번 사진이고, 이건 이번에 찍은 사진이고, 지난 번에는 여기가 이랬는데 이번엔 여기가 이렇고, 별 차이는 없고, 여기는 그대로 남아있고, 여기도 비슷하고, 여기는 약간 달라졌고… 주저리 주저리 말을 내뱉는다. 항상 느끼지만 진료라는 건 짧은 즉흥연극의 이어붙임인 것 같다. 실시간으로 대사를 조합해서 내뱉는다. 청자의 나이와 성별, 현재의 상태, 이전의 진료 기록, 치료의 방침, 약을 얼마나 올릴 것인지, 얼마나 내릴 것인지, 다음 검사는 언제 할 것인지, 잘했다고 칭찬할지 못했다고 혼을 낼지, 내 말의 어투와 수위는 반응에 따라 초 단위로 조절된다. 격려가 필요한 자들에게는 부드러운 어투로, 일침이 필요한 자들에게는 얼른 죽비를 꺼내들고…경우에 따라서는 한참 어르신에게 호통을 쳐야 할 때도 있다.

아랍의 엑스레이는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낫지도 않고, 더 나빠지지도 않았다. 나는 몇 달 간 쉽사리 호전을 보이지 않는 아랍의 상태가 걱정된다. 항생제 카드를 다시 꺼내들 때인가 싶다. 결핵 두 글자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마 검사는 지난 번에 했던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확인해봐야겠다. (열어보니 전부 negative이다.) 일단 항생제를 충분기간 사용하면서 경과를 봐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항생제 때려부으면 되지 않냐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항생제 장기 사용 시 부작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risk/benefit 사이의 줄타기를 잘 해야 한다. 의료는 선택의 연속이다. 이 검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약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약을 바꿀 것인가 말 것인가, 추가 검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다음 검사는 언제 할 것인가, 이 약을 언제까지 쓸 것인가, 내가 계속 붙잡고 볼 것인가, 다른 곳에 보낼 것인가. 앞에 한 풍경이 펼쳐진다. 양발을 나란히 붙여서 걷기도 좁아보이는 매우 협소한 길이 한 줄로 쭈욱 나 있다. 멀리 보고 가늠하면서 가고 싶지만 멀지 않아 시야는 어두워진다. 자세히 보니 양 옆은 새까만 낭떠러지이다. 내 눈에만 보이는 이 어두운 풍경을 굳이 환자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고, 그럼에도 나는 어딘가에는 말을 해야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쓴다.

몇 마디 시덥잖은 이야기가 오간다. 중요결정을 내린 다음의 여유로운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이 좋다. 가끔은 머리아픈 결정같은 거 하지 않고 그냥 환자들하고 실없는 농담따먹기만 하면서 지내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싫증을 낼 것이다. 권태를 쉽게 느끼는 인간은 애써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나름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아랍과 두부는 시종일관 투닥투닥이다. 진료실 의자가 하나 밖에 없어서 아랍이 앉았다. 옆에 선 두부는 계속 아랍에게 다가가며 어깨를 어루만지고, 아랍은 그런 두부의 스킨십이 짜증스럽기만 한지 자꾸 팔꿈치를 들어 두부를 쳐낸다. 저 사랑싸움은 뭐지…부럽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이따 보자는 말로 아랍과 두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선선히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몇 시간 뒤에 투석실로 올라가 다시 아랍과 만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좀 이따 봐요, 진료실 문이 닫힌다. 다음환자 알림이 뜬다. 다음 단막극을 준비할 차례이다.